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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음악협회, 6일 창작 오페라 '직지' 갈라콘서트충북음악협회는 지역 대표 문화콘텐츠이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의 역사 이야기를 다룬 창작 오페라 '직지'를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무대에 올린다고 1일 밝혔다.6일 오후 7시30분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은 '직지'의 유명곡을 엄선했다. 서곡과 간주곡을 작곡가 강효욱이 새롭게 선보인다.2000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초연 당시 '최초의 한국오페라'란 부제에 걸맞은 국악기 위주의 오케스트라 편성과 승무를 비롯한 다양한 한국전통무용, 상여소리, 삭발식 등 다양한 문화적 볼거리로 화제를 모았다.오페라 직지는 한국음악의 거장 박범훈 작곡과 김승환·김민형 대본이 만났다.공연은 모두 4막으로 구성됐다.1막은 '불모의 땅', '불모의 세월', '사랑의 아픔', 2막은 '가시리', 3막은 '마음의 등불' 등의 명곡이 흐른다. 4막은 '청주의 하늘은 맑은데', '직지의 노래' 등으로 감동을 선사한다.이번 공연은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의 '2021 기록문화 예술창작발표 지원사업' 선정으로 제작 지원을 받았다.이영석(청주시청소년오케스트라 지휘자) 지휘로 소프라노 김계현(묘덕 역), 메조소프라노 김하늘(수춘옹주 역), 테너 배하순(허숙 역), 바리톤 최신민(정안군 역), 베이스 박광우(백운화상 역)가 블루윈드앙상블과 청주오페라앙상블합창단 등 지역예술인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강진모 충북음악협회장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를 주제로 한 이번 오페라로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공연 관람은 무료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공연장 방역수칙에 맞춰 당일 선착순(200명)으로 지정좌석권을 무료 배부한다. 초등학생 이상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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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예술원법 >의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하는 문인 성명서” 발표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 744명이 함께 한 "< 대한민국예술원법 >의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하는 문인 성명서”가 발표됐다. 이번 서명은 8월 9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진행되었다. 성명을 통해 문인들은 현재 문제가 제기된 "대한민국예술원법 5조 회원의 선출, 6조 회원의 임기, 7조 회원의 대우 조항의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했다. 이들은 먼저 현재 기존 예술원 회원에게 있는 신입 회원 선출권을 공신력 있는 외부 추천위원회에 넘겨 불필요한 오해와 잡음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또한 2019년 법 개정을 통해 ‘평생’으로 변경된 회원의 임기를 4년 단임제로 바꿀 것을 촉구했다. 더불어 매달 180만 원씩 지급되는 예술원 회원의 정액수당 등 대우와 관련된 조항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바꿔 예술원의 독립성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한국작가회의’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현장소통위원회’ 역시 < 대한민국예술원 >의 전면적인 개혁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번 문인 성명서의 실무를 맡은 소설가 이기호에 따르면 "2,30대 젊은 문인들의 참여도가 특히 높았으며, 소속되어 있는 작가단체나 지역, 장르와 상관없이 < 대한민국예술원 >에 대한 개혁 의지가 높았다”고 밝혔다. 또한 "참여한 문인 744명 외에도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 329명의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성명서 발표에 동참”해주었다고 전했다. 성명서에 동참한 문인들은 이를 계기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 문체부에서 더욱 적극적인 < 대한민국예술원법 > 개정 노력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기로 했다. 문인 성명서 전문과 참여한 문인 744명의 명단, 미술, 음악, 영화, 연극 등 예술인, 시민 329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 대한민국예술원법 >의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하는 문인 성명서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우대·지원하고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을 행함으로써 예술발전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의도로 지난 1954년 설립되었다.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무용 등 총 4개 분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91명의 회원이 소속되어 있다. 한 해 지원되는 국가 예산은 32억 원이 넘으며, 이 예산의 대부분은 회원 개개인에게 매달 180만 원씩 지급되는 정액수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지금과 같은 제도로 운영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음과 같이 < 대한민국예술원법 >의 개정을 요구한다. 1. 대한민국예술원법 제5조 (회원의 선출)의 개정을 요구한다. - 현재 대한민국예술원의 신입회원이 되려면 본인이 입회원서를 내거나 기관이나 단체가 추천한 자를 기존 회원이 심의, 전체 회원 2/3 이상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말은 제 아무리 예술적 공헌이 뛰어나다고 해도 기존 회원들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입회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예술적 공헌보다도 기존 회원들과의 ‘친교’가 회원 선출의 더 중요한 잣대가 되어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회원 대다수가 특정 학교, 특정 장르 출신이라는 오명도 쌓고 있다. 이를 전면 개정해서 기존 회원들만의 의결이 아닌, 별도로 구성된 외부 추천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를 거칠 것을 요구한다. 2. 대한민국예술원법 제6조 (회원의 임기 등) 또한 개정해야 한다. -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의 임기는 ‘평생’이다. 원래 연임제였던 것이 2019년 11월 법 개정을 통해 ‘평생’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어떤 공적 자리의 임기가 ‘평생’ 동안 보장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전근대적인 ‘신분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회원의 임기를 ‘4년 단임제’로 바꿀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3. 대한민국예술원법 제7조 (회원의 대우)는 우리시대 예술의 위상과 역할에 맞게 개정되어야 한다. -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은 매달 180만 원씩 정액수당을 지급받고 있다. 정액수당 외에도 각종 창작지원금도 지급되고 있다. 회원 중 대다수는 정년퇴직한 교수로 이미 국가 예산이 상당 부분 포함된 연금 혜택자들이다. 이런 예술계 상위 1% 회원들에게 또다시 국가 재정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이중지원이며 분배정의에 어긋난 특혜이다. 예술원 회원들의 명예는 수당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무보수 명예직으로 전환하여 예술의 독립성을 더 강화할 것을 요구한다. 예술은 늘 ‘종결 없는 생성’을 추구한다. 해체하고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은 비로소 예술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는 쉼 없이 변화하는 예술원을 원한다. 이것은 ‘세대’와 ‘공정’의 문제가 아닌 ‘상식’의 문제이다. 국가의 문화예술 예산 방향성은 언제나 새로운 것, 신인 쪽으로 집중돼야 한다. 그래야 정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 대한민국예술원 >의 진정한 개혁과 < 대한민국예술원법 >의 전면적인 개정을 요구한다. 소설 (총 273명) 강나윤 강대호 강동수 강화길 강희영 고광률 고은규 고은주 고하경 구병모 권상혁 권여선 권오단 권정현 권현옥 김강 김경 김경란 김기창 김나경 김나은 김나정 김남일 김다경 김도연 김동하 김미월 김민경 김민효 김병운 김서령 김선민 김설아 김성은 김소연 김순정 김승미 김애란 김유담 김의경 김이설 김이정 김이환 김인철 김재영 김정란 김정진 김종호 김주욱 김지원 김한숙 김해솔 김현주 김현진 김혜나 김혜원 김호연 김휘 김희선 김희진 나푸름 노은지 도수영 도재경 라유경 류원 명지현 문경민 문미순 문지혁 문진영 문혜정 민병훈 박경희 박문구 박민정 박사랑 박상영 박선우 박솔뫼 박이수 박인 박일우 박일재현 박정윤 박종규 박지음 박향 박형서 박희주 반수연 변영희 배길남 배상열 배이유 백가흠 샤무아 서성옥 서영주 서용좌 성민선 성보경 성은영 성지혜 손현주 손홍규 송경아 송미성 송지은 신상진 신승철 신종석 신호철 심너울 심봉순 심아진 심이슬 심현서 안보윤 안이희옥 안정희 안준원 안지숙 양난영 양선형 양정규 양진 양태석 염승숙 예소연 오선호 오정연 오현종 우다영 원종우 위단비 위수정 유경숙 유시연 윤성희 윤영 윤재룡 은미희 이가현 이갑수 이경 이경희 이기호 이만교 이만영 이무성 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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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게 듣다] 판소리의 미래, 전북도 심청가 보유자 장문희(張文姬)에 듣다전라북도는 지난 5월 7일 자로 장문희(45,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 단원)를 송재영(61,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과 함께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로 확정하여 인정서를 교부했다. 그리고 고창군 (사)동리문화사업회는 보유자 인정 기념공연을 7월 3일 개최하고 기념패를 수여 했다. 이번 전북도의 판소리(심청가) 보유자 복수 지정은 2019년 태평무와 승무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지정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도 차원에서 복수로 지정한 것은 처음이므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문희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1995년), 일반부(1998년), 명창부(2004년)에서 모두 장원을 수상한 ‘천재 소리꾼’으로 일찍이 주목받았다. 또한 조선 8대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자 동초제 여류 명창 이일주의 조카로서 어렸을 때부터 이모님의 손에 자라며 소리를 배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절로 떠오르는 듯하다. ‘애기명창’, ‘명문(名門)의 기대주’를 지나고 ‘명창’을 넘어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보는 장문희. 보유자 인정서 수령을 앞두고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귀명창이 늘었으면~ 동초제의 맛과 가치를 알리고 싶다 " Q 보유자 지정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소감이 어떠한가. A 두 사람이 동시에 지정된다는 것이 전북에서는 처음이지만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 아주 놀랍지는 않았어요. 제가 지정된 것은 스승이신 이모님께서 제가 올바로 이어받을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신 덕입니다. 함께 지정된 송재영 보유자님도 제 이모님의 제자이신데 이모님께서 그만큼 제자들을 잘 길러내신 것 같아서 기뻐요. 또 제가 보유자로서는 어린 나이이지만, 한평생 한길만 걸어왔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높이 사주신 것 같아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Q 부담도 분명 있을 텐데. A 그렇죠.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전승해야 한다는 무게감, 이모님의 뒤를 올곧게 이어가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 느껴지긴 합니다. 또 우리 동초제를 배우는 후배들이 끝까지 공부할 수 있고 환경적인 요건도 잘 마련해주고 싶다 보니 책임감과 부담감이 적지 않습니다. Q 함께 지정된 송재영 보유자와 비교할 때 자신만의 특징은 뭐라 생각하는가. A 이모님과 가장 흡사한 것, 가장 닮은 것이죠. 이모님의 표목이라는 게 있어요. 이일주 선생님의 수리성과 철성, 또 감정 표현할 때의 호흡조절, 소리의 이면, 수리성으로 소리의 이면을 완성해내는 기술…. 그런 것들이죠. 핏줄이니 얼굴도 닮았고 자세도 그렇고요. (웃음) Q 그렇다면 이모님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A 글쎄요. 어릴 때부터 제가 소리를 하면 영락없이 이모님 같다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어요. 입 모양, 발림, 표정까지 어찌 그리 이모님과 똑같냐고요. 한 번은 제가 소리를 하니 이모님도 따라 부르셨는데 제가 봐도 숨 쉬는 모습, 배에 힘주는 모습이 똑같은 거예요. 이모님께서도 저보고 "너는 어째 나와 입 모양, 혀 붙임까지도 똑같냐.” 말씀하셨었죠. Q 그래도 차이점을 꼽는다면? A 음, 목소리나 아니리에서의 감정 표현에서 이모님이 더욱 숙성되셨다면 저는 젊은 면이 있다는 게 다른 듯해요. 그가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명창부 장원을 수상했을 때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오랫동안 지켜봐 온 유영대 고려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장문희 보유자를 이일주 명창과 비교한다면 거친 부분이 없다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아주 꾹꾹 눌러서 부르기 때문에 감정적인 표현 부분에서 단아하고 차분하며 정성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이모와 가장 닮았지만 자신만의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대 여류 명창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극찬은 덤이었다. 인정서 수령만을 앞둔 시점에서 보유자로서의 다짐과 입장은 어떤지 궁금했다. Q 보유자로서의 각오가 궁금하다. A 예전부터 저는 지속적으로 완창 공연을 하려 노력해왔어요. 제 나이 또래에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일이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완창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완창무대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고 우리 후배들도 같이 완창무대를 많이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주고 싶어요. 우리 판소리 본연의 맛과 가치를 보이고 동초제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겠다는 게 각오입니다. Q 후배 양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인다. A저는 문화재로 지정된 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이런 자리를 주신 것 같기도 하거든요. 종종 이런 경우도 있어요. 자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거나 무언갈 이뤘다고 생각하면 본인의 멋에 취해서 본연이 아닌 변형된 것으로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Q 맞다. 속된 말로 ‘쿠세’라고 하지 않나. A 네. 안 좋은 버릇 같은 거죠. 저는 그런 것들을 계속 경계하면서 저의 뿌리를 흔들림 없이 지키고 후배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요. 우리 음악을 좀 더 제대로 올곧게 전승시키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Q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변치 않겠다는 의지인가. A 그렇죠. 저는 제 삶이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6살 때부터 판소리만 해왔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소리가 지금도 힘들고 어려워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보이기 시작해요. Q 힘들고 어렵다 해도 오랜 세월 함께한 만큼 친근하기도 할 텐데. A 맞아요. 음… 말하자면 친구죠. 소리는 친구예요.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게 소리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오면서 여러 인연을 맺어왔지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건 역시 소리였어요. 순간과 순간, 과정과 과정에서 너무 힘들기도 했지만 제가 노력한 만큼 그 대가… 그 결실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건 소리뿐이었죠. 가장 저를 힘들게 한 게 소리였지만 그 힘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도 소리였다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게 사람도 아닌 소리였다는 장문희.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든 소리였지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던 것도 소리 덕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소리와의 동고동락이 아닌가. 명문 명맥의 후계자로서 그에게 지워진 부담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어떻게 소리 생활을 시작했는지, 어떤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는지 궁금해졌다. "조카지만 항상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게, 어떨 때는 더 엄격하고 혹독했습니다." Q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가. A 제가 서울 방배동에서 태어났어요. 3~4살쯤에는 아버지 본적인 강원도에서 지냈는데, 6살 때 어머니께서 어떤 일이 생기셔서 청주로 잠깐 갔어요. 그러다가 그해 겨울 판소리를 배우러 이모님 댁에 혼자 가게 됐지요. 왜 가게 됐냐 하면 당시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렵기도 했고 이모님께서도 당신을 이을 만한 제자를 곁에 두고 직접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또 나중에 중학생이 돼서야 알게 됐는데 어머니께서도 원래 국악을 하셨대요. 그런데 결혼하면서 꿈을 못 이루게 됐으니 딸인 제가 대신 이뤄주시기를 바란 마음도 있었겠지요. Q 어머니께서도 국악을 하셨다니 놀라우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머니께선 무얼 하셨나. A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에 소리도 하시고 무용도 하시고 장구도 치시고 두루 잘하셨대요. 어머니와 이모님을 모두 아시는 분 원로 선생님 중에는 이모님보다 좋았다고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를 낳으신 뒤로는 생업으로 바쁘셔서 국악을 놓으셨다고 해요. 그렇다 보니 이모님께 가기 전에는 국악을 접해보지 못했어요. 이모님께서 무얼 하시는지도 몰랐었죠. Q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소리를 배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A 가족과 떨어져 이모님 댁에서 생활하면서 소리를 배웠지요. 저희 이모님께서 엄청 엄하셨어요. 어린 조카이지만 살갑게 대해주신 적이 많지 않았지요. 조카지만 항상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게, 어떨 때는 더 엄격하고 혹독하게 하셨어요. Q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A 이모님께서는 항상 엄하셨지만 그러시다가도 한 번쯤, 예를 들어 제가 아플 때면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정성스레 죽을 쒀 주곤 하셨어요. 또 제가 상을 받거나 하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주 기뻐해 주셨는데, 그럴 때면 이모님의 사랑과 애틋함을 느끼곤 했지요. 이런 것들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Q 부모님께 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 A 어릴 적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홀로 던져진 채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힘들었지만 어떤 출구도 제겐 없었어요. 이모님 집에서 나갈 수도 없고 다른 걸 할 수도 없고 말이죠. 만약 어머니께서 곁에 계셨다면 소리를 포기했을 것 같아요. 제가 전주에 내려가고 어머니를 다시 뵌 게 중학생 때였거든요. 전주로 이사 오셔서 종종 뵐 수 있게 됐는데, 그전에는 통화할 수도 없고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많이 힘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나 제가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Q 정말로 포기할 뻔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A맞아요. 변성기 때였지요. 14살쯤에 변성기가 왔는데 ‘내가 내 목소리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데 이걸 어떡하지?’ 싶었어요. 벽에 부딪쳤달까요. 그래서 그냥 ‘나 소리 안 해.’하고 한 번 놨던 적이 있어요. Q 어머님과 이모님께선 반응이 어떠셨나. A 엄마도 이모도 그럼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몇 달 정도 이모님 댁에서 생활은 계속하면서도 소리는 쉬고 있었는데 언젠가 갑자기 ‘아, 소리 하고 싶다. 저 무대에 내가 서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신기하죠? 지금 돌아보면 제가 다시 소리할 거란 걸 두 분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때를 계기로 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내가 정말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네요. Q 타의로 시작한 소리 생활이 자신의 뜻으로 바뀐 것인가? A맞아요. 그렇지만 이모님의 칭찬도 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상을 타면 받는 상장과 상금도 좋았지만, 이모님께서 제 소리를 인정해주시고 "아이고, 내 새끼”라며 엉덩이 한 번 토닥여주시고 어깨를 어루만져주실 때… 저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었어요. 이모님의 칭찬이 저에겐 가장 큰 선물이었고 10년, 20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장문희라는 사람에게 소리는 삶 그 자체가 되었던 것 같아요. Q 처음으로 참가한 경연대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A 9살인가 10살에 여수진남제(현 여수진남전국국악경연대회)에 나갔어요. 그때 인기상을 받았는데 위아래로 노란 한복을 입고 소리를 했죠. 이모님께서 북을 쳐주셨어요. 무대에 서니 많이 떨렸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니 주변에서 많이 칭찬해주셨고, 이모님께도 좋아하셨어요. 이후로도 대회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이나 반응을 얻으면 이모님께서 흡족해하시다 보니 더 예쁨 받고자 소리를 열심히 하게 됐죠. "춘향가를 부르면 춘향가가 좋고 심청가를 부르면 심청가가 좋아요. 어떤 바탕이 좋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좋아요.” Q 심청가로 보유자에 지정됐지만 처음 배운 것은 춘향가라고 알고 있다. A네. 6살 때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게 춘향가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춘향가를 떼게 됐고, 다음으로 배운 게 심청가였어요. 이후에도 하나씩 배울 때마다 새롭게 반하게 됐어요. 바탕마다 목 쓰임과 감정에 차이가 있고 고유의 매력이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Q 가장 좋아하는 바탕을 꼽자면 무엇인가. A 춘향가를 부르면 춘향가가 좋고 심청가를 부르면 심청가가 좋아요.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죠. 어떤 바탕이 좋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좋아요. Q 이후에는 어떤 바탕을 배웠나. A 중학교 때 심청가를 뗐고, 고등학생 때 흥보가, 대학생 때 수궁가, 그리고 대학원생 시절에 적벽가를 배웠지요. 앞서 배운 네 바탕은 모두 이모님께 배우고, 적벽가는 안숙선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Q 적벽가만 다른 분께 배운 이유가 있는가. A 제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곳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도 많이 하고 노력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했는데, 학교에 가보니 안숙선 선생님께서 교수님으로 계셨지요. 그런데 당시에 제가 안 배운 바탕은 적벽가뿐이었어요. 다른 바탕을 배우게 되면 ‘바디’와 ‘제’가 겹칠 우려가 있었거든요. Q 이모님께서는 뭐라 하셨나. A 이모님께서도 적벽가를 배워보라고 권유하셨어요. 배우고 나서 이모님께 들려드리니 안숙선 선생님의 적벽가가 제게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죠. Q 이력을 보니 중학교와 대학교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졸업한 것이 의아하다. A 일찍이 예술전문 학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당시 전주에는 예고가 없다 보니 서울로 진학하고 싶다고 이모님께 말씀드렸지요.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 어린 나이에 독립하는 문제 등으로 결국 전주의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학생부 차상을 받게 됐는데, 당시 서울국악예술학교의 이사장이셨던 박범훈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3학년 때부터 서울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Q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왜 다시 전주로 내려갔나. A 박범훈 선생님께서 다른 대학은 시험도 보지 말라면서 중앙대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면서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지요. 실기시험 때 참가자들 중에서 오직 저만 심사위원분들로부터 추임새를 받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합격할 거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아니었던 게지요. Q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 A 그때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보게 됐어요. 승승장구만 했으니 자칫 기고만장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뭐 충격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약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다른 대학을 알아보려 하니 서울에 오래 있으면 소리가 정체될 수 있다고 이모님께서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모님께서 출강하시던 우석대학교로 가게 되었지요. Q 이모님께 배운 것과 학교에서 배운 것은 어떻게 다르던가. A 실기적인 부분에서는 이모님께 배우는 것을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어요. 다만 소리의 역사라든지 이론적인 부분들은 학교를 통해 많이 깨우칠 수 있었지요. 또 이모님의 소리 외에 다른 선생님들의 소리를 접하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어요. 2004년 그는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수상하였다. 학생부와 일반부 장원에 이어서 이른바 삼관왕에 오른 것이다. 국악계에 전무후무한 성과였다. 그런데 이보다도 놀라운 것은 장년들이 주로 참여하는 명창부에서 스물여덟이란 나이로 받은 최연소 장원이란 점과 더불어 심사위원 7명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대회 측에서는 명창부 참가자의 연령을 제한하기로 규정을 바꾸었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성인으로서 숙성된 저의 소리와 가능성을 다른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Q 2004년 전주대사습놀이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이모님께서 참가를 반대하셨다던데. A 그러셨어요. 처음에는 반대하셨지요. 명창부치고는 어린 나이였거든요. 바로 전년도에 이모님의 다른 제자인 송재영 선생님께서 장원을 하기도 하셨고요. 한 스승의 제자가 연달아 수상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나가고 싶다고 이모님께 거듭 말씀드렸어요. Q 고집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A 애기명창들이 오래 못 간다는 말이 있어요. 어릴 때 잘하던 소리꾼도 성장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저는 그런 한계를, 그 고비를 넘어서고 싶었어요. 성인으로서 숙성된 저의 소리와 가능성을 다른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꾸준히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혹 무대에서 실수하더라도 꼭 도전해보고 싶다고 피력했죠. 결국 허락해주셨어요. Q 어떤 대목을 불렀나. A 예선에서는 ‘천지삼겨’를, 본선에서는 ‘오리정 이별 대목’을 불렀어요. 대회 규정상 추첨으로 (부를 대목을) 뽑는 거라 뭘 부르게 될지 미리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춘향가 중 제가 연습 당시 특별히 좋아했던 대목들이 추첨에서 나왔어요. 행운이었죠. 아마도 이모님 덕이었던 것 같아요. Q 이모님 덕이라니? A 이모님께서 종종 ‘운수패’라고 해서 화투패로 점을 치셨거든요. 그날 아침도 이모님께서 제게 화투패를 고르게 하셨는데 돼지와 학을 뽑은 기억이 나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풀이해주셨죠. 사실 그날따라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평소에 좋아했던 대목이라 떨지 않고 초연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결국 최연소, 최고점 장원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A 기쁨은 찰나였어요.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점수가 하나둘씩 공개될 때에는 좋았지요. 그런데 일곱 분 모두에게 99점을 받고 나서는 두려움이 확 밀려왔어요.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아주 막중하게 느껴졌어요. 저를 인정해주신 분들께 절대 누를 끼쳐선 안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Q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건 아닌가. A 아뇨. 전혀 아니에요. 혹시라도 ‘변했다. 연습 안 한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어요. 더 실력을 갈고 닦으면서 전통 본연의 것을 계속 고수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렇다 보니 지금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다는 말에, 그의 어깨에 지워진 중압감과 부담감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천부적인 소리꾼으로서 평탄하게 살아온 줄 알았건만 그에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화려한 집안 내력과 수상 경력 뒤에는 무겁고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삶의 대부분을 소리와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경주마처럼 오직 소리에 집중하며 달려온 나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던 성취임을 알 수 있었다. Q 음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춘향가로 판소리를 시작하고 명창부 장원을 수상했는데 첫 음반으로는 심청가를 선택했다. A 이모님께서 심청가 보유자이시니까요. 가문을 이어야 하다 보니 심청가를 선택하게 되었죠. 제가 자리매김하려면 이모님의 소리인 심청가로 무대를 많이 해야 했지요. 그래서 여러 공연과 발표회에서 심청가를 부르고 음반도 자비를 들여서 내게 됐습니다. Q 음반제작 작업은 어떻게 했나. A 2017년 M-net의 ‘더 마스터’라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작곡가 김형석 선생님과 친분이 생겼는데, 그분의 스튜디오를 빌려 녹음했어요.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다음 음반 녹음에도 부탁드릴 생각이에요. Q 다음 음반 녹음이 예정돼있는가. A 네. 춘향가를 녹음할 계획이에요. 올해 예정된 순회공연과 정기공연이 끝나면 아마도 10월부터는 녹음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내년 늦어도 내후년 상반기까지는 녹음을 마칠 계획이고 이후로도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대로 작업해서 나머지 네 바탕의 음반을 한 번에 출시할 계획입니다. 다만 적벽가는 안숙선 선생님께 배운 박봉술제로 녹음할지 이모님의 동초제로 할지 둘 다 할지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어요. Q 다섯 바탕을 모두 음반으로 낸다는 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A 맞아요. 그래서인지 특히 여류 소리꾼 중에 다섯 바탕 모두 음반을 내신 분들은 극히 드물죠. 하지만 이모님께서 다섯 바탕 모두 음반을 내셨으니, 저도 다섯 바탕 모두 내는 게 오랜 목표였어요. 이모님의 길을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또 저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자 공부인 셈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도전하고 공부한 결과를 후배들을 위해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어요. Q 출시가 기다려진다. 장문희 보유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설적인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다. 핏줄과 명맥에 대해 실감해본 적 있나. A음, 이날치 할아버님께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아주 대단한 분이시죠. 그분이 남기신 예술의 아득한 경지…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대단하세요. 하지만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라 떠올리면 사실 막연해요. 이날치 할아버님은 글 속에서나 뵀지. 제가 직접 느끼고 배운 분은 이모님이니까요. Q ‘이날치’ 밴드가 큰 화제이다. 이처럼 퓨전국악이 최근 대중에게 주목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A 이날치 밴드에게는 감사하죠. 국악이 생소한 대중들에게 퓨전국악이 전통음악을 이해하는 좋은 발판이 되기 때문이죠. 또 이날치 밴드가 좋은 활동을 함으로써 가문이 더 알려진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이날치 밴드는 이날치 밴드고 장문희는 장문희잖아요? Q 그렇다. 장문희는 장문희이다. A 요즘의 퓨전국악들도 중요하지만 저는 전통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하는 건 대중의 권리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음악의 뿌리는 국악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었으면, 가끔은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봐 줬으면 좋겠어요. 전통음악의 맛을 알려면 결국 익숙해져야 하거든요.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국악을 찾아봤을 때, 전통음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렵고 알아듣기도 힘들지만 계속 듣다 보면 판소리만의 깊은 울림이 있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네요. Q 판소리의 가치와 울림을 알린다는 게 장문희의 꿈인 건가. A 예, 꿈이라기보다는… 꿈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귀명창’이라고 해서 소리꾼과 같이 함께 울고 웃고 대중들이, 관객들이 많았어요. 같이 호흡하는 분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분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Q 코로나19로 공연환경이 위축되니 더욱 그런 듯하다. A 네.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셔야 소리하는 입장에서도 더 재미있고 보람도 생기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소리꾼들이 설 수 있는 자리도 더욱 많아져야 하는데 이런 과정에 제가 보탬이 되었으면, 저로 인해서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게 꿈이에요. Q 마지막으로 ‘장문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요즘은 다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리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깊이 들어가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저도 아직 소리가 힘들어요.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힘들 거 같아요. 하지만 양면적인 거거든요.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겨냈을 때 오는 행복, 카타르시스가 큰 것 같아요. 도전해서 극복했을 때 오는 성취감인 거죠. 그러니 후배들도 절대 성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차분하게 이어가기를 당부하고 싶어요. 판소리 명가 출신, 전주대사습놀이 삼관왕, 최연소 심사위원 전원 만점 명창부 장원, 전북도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소리꾼으로서 꿈꿀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룬 듯하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강조한 바가 있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보인다고. 당장의 목표는 남은 네 바탕의 음반 출시라고 한다. 음반 취입이라는 ‘고비’마저 넘었을 때 과연 그에게 또 어떤 ‘고비’가 나타날까. 그리고 그 ‘고비’를 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명창에서 더 큰 길로 나아가려는 이가 길을 찾지 못한 채, 중압감에 넘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다시 ‘고비’를 넘어서면서 안겨줄 놀라움과 벅찬 감동, 우리 판소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백년에 한번 나온다는 소리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국악계를 밝히는 별, 장 문 희! 자문: 정문교 국악신문 고문/ 유영대 고려대 교수/최동현 前 군산대 교수 교열:조용상 위원 수상 1994년 12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차상 1994년 10회 동아 콩쿠르 학생부 판소리 금상 1995년 13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장원 (교육부장관상) 1998년 2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 (문화체육부장관상) 2001년 제1회 공주전국명창·명고대회 판소리 명창부 대상 (국무총리상) 2004년 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 부문 장원 (대통령상) 2012년 전주MBC 광대전 시즌 1 준우승 2015년 전주MBC 광대전 시즌 4 왕중왕전 명창대첩 우승 2017년 Mnet 더 마스터 우승 (4회, 5회 그랜드 마스터) 경력 장문희 판소리연구소 소장 난석 이일주 전수관 ‘난석당’ 관장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장(2002년 5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심청가 보유자(2021년 5월 7일) 학력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우석대학교 국악과 졸업 한예종 전통예술원 전문사과정 수료 음반 단독 2019년 "장문희 심청가 동초" (완창 앨범) 2019년 "이화우 흩뿌릴 제" (싱글) 참여 2017년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 Part.3" - 이몽룡아 (Duet. 샵건) 2017년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 Part.2" - 하늘이여 2007년 "단심(丹心) 국악방송 새음원 시리즈" - 장문희 단가-적벽부, 사철가, 초한가 2004년 "판소리 EAST TO WEST" 세계 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 걸작선정 음반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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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춘향국악대전 경연대회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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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춘향국악대전 명창부, 흥보가 웃고 심봉사 눈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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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강, ‘대금과 함께 하는 국악 이야기’ 온라인 강연지난 11일(화) 금성당⋅샤머니즘 박물관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 이생강 선생이 ‘대금과 함께 하는 국악 이야기’라는 주제로 비대면 강연을 진행하였다. 대금, 소금, 단소, 향피리, 태평소, 퉁소 등 국악 관악기의 분류와 운지법과 특징에 대하여 소개한 뒤 이호용 원장(한국민속악 교육연구원)의 장구 반주에 맞춰 ‘정선아리랑’, ‘뱃노래’, ‘양산도’, ‘성주풀이’. ‘대금산조’, ‘시나위’ 등을 연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연에 참여한 수강생 함 씨는 "이런 연주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라고 실시간 채팅으로 소감을 남겼으며,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예정시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칠갑산’ 등 대중가요 메들리가 앵콜로 이어졌다. 이생강 선생은 "전문 국악인뿐만 아니라 국악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이생강 선생은 오는 5월 28일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공개행사를 진행한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는 무형유산의 대중화와 보전·전승 활성화를 목적으로 매년 개최되는 행사로 5월 2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무대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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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전북도 무형문화재 ‘동초제 심청가’, 장문희 보유자 지정 확정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동초제 심청가’ 이일주(이옥희) 계보 잊는 후계 보유자가 확정, 공고되었다. 오늘 전라북도는 고시 제2021-132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고시’를 냈다. 5월 2일 한 달 간의 지정 예고 만료에 따른 어제 회의에서 송재영(1961생, 현 전주대사습놀이 이사장)과 장문희(1976생, 현 전북도립창극단 수석) 2명을 보유자로 확정했다. 주변에서는 지난해 심사 결과 기준을 넘긴 2인을 두고 단수 또는 복수 지정의 문제로 장고에 들었다 오늘 복수로 지정을 확정한 것이라고 전했다. 장문희 보유자 예고에서 인정 1단계로 "전승능력(전승활동),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에 대한 조사지표 항목 평가결과 우수”로, 인정 2단계로 "전승능력(전승기량, 전승역량), 전승환경(전승기반) 평가 결과 우수”로 명기하였다. 이수자에서 오늘 공식적인 보유자기 된 장문희 명창은 2004년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경연에서 최고 권위의 심사위원들로부터 전원 만점(99점)을 받아 최연소 명창 반열에 올랐다. 이에 대해 최동현 군산대 교수는 "깨끗하고 높낮이도 자유롭다. 차세대 명창들 중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다.”라는 평가했고, 국악신문 기사에서는 "제 나이에 맞는 겉넘지 않은 여문소리로 현재와 미래의 최고 명창이다.”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편 장문희 명창은 5월 8일 남원에서 심청가 완창 공연을 앞두고 국악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소감을 밝혔다. "전주대사습놀이 학생, 일반, 명창부 연속 장원에 최연소, 최다 득점 보유라는 기록 때문에 책임감으로 무거웠습니다. 이제 이일주 스승님의 대를 잊는 막중한 책임이 더해지니 더 무겁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통판소리만큼 좋은 것을 만나지 못했어요. 사람의 성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대신할 예술이라는 확신과 소신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2004년 5바탕 완창 음반 취입을 계획했던 음반사 신나라 한 관계자는 보유자 지정에 대해 당연한 결과라면서 "앞으로 50년은 장 명창의 소리가 판소리계를 이끌 것”이라는 기대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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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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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의 손’ 세계적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네번째 인터뷰는 시각예술가 김선미 교수(서경대)이다. 3월 6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 마루 아지트갤러리에서는 ‘신의 손’이라는 김선미 교수의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식 기념 및 사진 전시가 진행되었다. 한편 김선미 교수의 연출로 코로나 극복 기원을 하는 이색 이벤트가 인사동 거리에서 열렸다.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주제로 13일 인사동 마루 야외공연장에서 바디페인팅 포퍼먼스가 열려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김선미 아티스트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기미양: 안녕하세요.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과 전시회를 축하합니다. 이번 행사를 마치고 한마디 소감은? 김선미: 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에 미치든, 누군가에게 미치든 평생 하나에 미쳐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행복한 일입니다. 미쳐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좋다면 그건 신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1년 넘게 언텍트시대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지난 작품들을 정리해 이번에 첫 출판을 했습니다. 20여년간 작업한 초창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Q: 통미분장예술연구소(統美扮裝藝術硏究所)는 어떤 목적을 가진 연구소인가요? A: 현재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 공감하고 저항하는 목소리를 개념미술로 재해석하여 비주얼로 형상화하는 시각예술 연구소입니다. 연구 목적은 '세상을 美로 아우르다'입니다. Q: 통미라는 의미는? A:통미(統美)라는 네이밍은 우리나라 전위예술가 1세대 무세중 선생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움의 큰 줄기는 자연이다. ‘자연의 모든 분야를 아름다운(美) 시각으로 아우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럿을 모아 한 한 판이 되게 하는 아우르다의 사전적 의미를 확장하면 통합(統合)의 개념이 됩니다. 모든 예술장르와 소통하고 美로 아우른다. 그래서 ‘통(統)+미(美)‘라는 뜻에서 ’통미‘라고 명했습니다. Q:선생님이 추구하는 작가정신은 한마디로 무엇인가요? A: 태초에서부터 현생 인류로 연결되는 인간을 생각해 봅니다.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먼 비문명인, 순수했던 인간의 영혼이 담긴 바디를 통해서 신을 닮은 ‘완벽한(Perfect) 아름다움’을 형상화 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의 속성, 반인반신(半神半人)중 신성성(神聖性)을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영적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Q:인간의 몸에 어떻게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인지요? A:인간의 바디, '살아 있는 몸'을 화폭으로 삼아 신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우리에게 신은 바로 자연입니다. 우리의 몸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땅속에서부터 하늘까지 모든 곳에 인간과 함께하는 정령이 존재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비추어 주는 태양, 바람도 물도 바위. 꽃 한송이 모두 정령입니다. 세상에 모든 곳에는 정령이 있습니다. 작은 조약돌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까지........ 자연계의 수많은 정령들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고기가 죽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에 바위, 나무, 꽃, 나비, 새. 물고기. 사과, 등을 그립니다. 우리는 오래 전 바다물 속에서 태어난 물고기에서 진화를 했습니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된 생명체라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Q: 이번 첫 출판은 어떤 내용이 정리되어 있나요? A: 1999년 가을 바디페인팅에 美쳐서 다니던 미술대학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한 달 만에 무작정 파리로 떠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듯 20여 년 동안 추구하고자 한 열정들이 분기별로 담겨져 있습니다. 초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이 20여년 동안 시대와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변화한 모습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중간에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 대학 박사과정도 수료했습니다. 혼자 바디페인팅을 공부하고 싶거나 수업을 진행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각예술가 입문과정 Q: 국내에서 독보적 존재인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가 되는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A: 한 때는 ‘필받다’ ‘미치다’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난 바디페인팅이 좋아서 필 받는 대로 20년을 미쳐 살다 보니, 미용학원에 바디페인팅 수업이 생겨 가르치게 되었고, 민간자격증과 미용대회가 생겨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는 분야의 전문가로도 살았습니다. 대학원이 생겨나더니 대학이 생기고, ‘교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보다는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었습니다. 때론 바디페인팅 작업을 혼자 하는 것이 어려워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던 때도 있고,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돈을 떠나서 무조건 고고하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에이터의 길은 노력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디란 말 그대로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입니다. 당연히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발끝(발톱 색깔)까지 모두 디자인해야 합니다. 모델에게 입힐 옷을 직접 구상해서 만들고, 어느 때는 특수분장도 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건축물 이상입니다. 숨쉬고 움직이는 건축물,,,,,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헤어와 에어브러시를 가르치면서도 난 여전히 자유로운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Q: 작가의 길을 가면서 어려운 점은? A: 외국은 크리에이티브 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기회도 제공해 주고 확장해갑니다. 세계는 가파르게 변해가는데, 한국은 2016년 '메이크업 국가자격증'이 실시된 이후로 급격히 크리에이티브 한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자격증 교육, 대회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과 작업하려는 동료 작가를 만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Q: 팬데믹 이전 작품전보다 오늘 작품전에서 달라진 점은? 인사동 거리에서 퍼포먼스 작품은 인상적이었습니다. A: 시대에 맞게 작품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팬데믹을 전후해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자연과 합일해야 살 수 있기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각인하기 위해 신화를 소환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여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 처럼, 바디페인팅을 통해 자연의 신을 소환했고, 그것이 팬데믹 시대에 문명과 충돌하며 저항하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표현했습니다.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전체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Q: 이번 출판 전시회에서 뮤즈로 분한 모델은 누구인가요? 작품을 쳐다보면 이국적 이미지와 아름다운 눈동자는 잠시 신화 속 이야기로 안내되는 것 같습니다. A: 러시아에서 온 금발 미인 소녀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나의 뮤즈로 활동한지 강산이 한번 변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이 좋아서 정착한 친구입니다. 김선미 작가론 Q: 예술이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A: 예술이란 예측불허라는 자연 앞에 살아가야 하는 약한 인간이 다음 세대의 계승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며.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신을 찬미하는 몸짓에서 기원했습니다. 저의 예술세계는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화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Q: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목적에 의해 신을 소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작품에서는 누구나 신의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여자는 여신이 되고 남자는 남신이 되고....어떤 사람은 꽃이 되고, 유니콘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하지요. 선생님 작품은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어느새 우리는 신화 속에서 걷게 됩니다. 전시장을 나와도 그 감동은 오래 오래 갑니다. 그런 신성한 감동은 상처 받았던 자신을 치유시키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화에서 모티브를 찾게 된 배경은? A: 저의 작품은 신화에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신를 소환하여 인간의 몸에 숨어있는 신의 모습을 찾아서 형상화 하고자 하는 작업이지요. 문명사회를 이루기 전 공동체 사회에서, 신화는 살아있는 역사이었습니다. 자연을 경외하고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모든 만물에는 정령이 있다고 여기면서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이 있는 시대에서는 마을에서 굶어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노숙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Q: 선생님 작품을 관객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문명의 이기 속에서 점차 빠르게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성 회복을 찾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까요? 큰 범주에서는 인공(Atificial)이 아닌 자연(Natural)을 의미하고, 작은 범주로는 문명에 의해 이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에 저항하는 작업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문명이 정착하기 전 인류 공동체가 공유했던 '아름다운 원시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느껴집니다. A: 모든 문학이나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성 회복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구나 마지막에는 신을 찾습니다. 누구에게는 어머니가 신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작품속에서 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Q: 21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더욱 고독하고, 개인과 개인의 이기적인 관계에서 집단과 집단의 이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욕망이 극대화하면서 자연 파괴의 결과로 코로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출판과 함께 공연한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퍼포먼스 연출 기획의도는 무엇인가요? A:결국 코로나라는 팬데믹도 문명의 이기라는 무기를 가진 인간의 빗나간 욕망으로 예측된 대참사입니다. 자연 파괴는 야생동물에서 가축들까지도 구제역으로 참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는 세계를 멈춘 팬데믹 상황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밝고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화려한 색상을 강조하여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의식을 표출하고자 했습니다. 이정민 무용수의 퍼포먼스, 서승아 무용가의 지신무로 코로나 극복을 간절히 표현했습니다. Q: 분장예술세계에서 김선미 작가는 국내에서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앞장서 가는 전위예술(前衛藝術)의 중심에 선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A: 과한 평가입니다. 저는 그림과 바디페인팅 아트의 세계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미국 가서 특수분장 배우고, 세계경연대회 나가고,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캐나다, 미국, 싱가폴 중국, 몽골, 러시아 등을 다니며 바디페인팅을 하는 동료 아트스트의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고 새로운 작업을 즐기며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Q:가장 영향을 주신 스승은 누구이신가요? A: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십니다. 소개하면 "1937년 5월 23일 서울에서 출생하신 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로서 1950년대부터 대학가의 저항문화였던 탈춤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소개했다. 또 1969년 서울 YWCA 강당에서 공연한 ‘민족극회 남사당 제50회기념공연’은 세간에 묻혀있던 ‘남사당’이라는 민중들의 밑바닥 예술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선보인 장본인이다. 한국에서의 전위예술 공연은 물론 독일과 미국 체류를 통해 한국 전통예술과 서구 전위예술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등 전위예술 공연만해도 국내외에서 500여 회가 넘는다. 특히 독일에서 발표된 "제3세계 연극論(1977, Munchen 세계 자유 연극제 국제 심포지엄)”은 서구 연극인들에게조차 획기적인 논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세중 선생님은 1982년 독일에서의 귀국 후 첫 공연 작품 "反 그리고 통·막·살 (TongMagSal)”은 남북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 한국 전위예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의 전위예술의 특징은 그 이론적 틀을 한국의 전통사상과 민중예술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50년 동안의 전위예술작업을 통해 이제 저자는 한국전위예술의 이론과 사상적 배경을 텍스트화 하여 정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시도와 결과들은 그의 생활과 예술행위의 일치성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에서 증명하고 있다. 한국 전위예술의 손꼽히는 춤사위인 ‘무사위’는 선생님의 천지인 사상이 녹아낸 창작물이다." Q:앞으로 작가로서의 행보는? A: 저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예술은 자위행위요. 다 똥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일캠퍼스에서 사람캠퍼스로 바꾸고 '살아있는 예술'(Living Art) 해왔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통하기 위해 이제 밖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메시지가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 문화예술과 만나서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을 하고 싶습니다. 국악계를 뒤흔든, 세계적 평가를 받은 이날치 밴드와 함께 하는 바디 페인팅 아트같은....... 시각예술은 어떤 예술 장르와도 배합이 자연스럽습니다. 초대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는 날, 마스크를 벗고, 새로운 옷을 입듯, 특별한 메이크업을 하고 지인들과 함께 페스티벌을 즐기던 행복했던 그날들이 다시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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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0편집국장 우실하 기업이든 언론사든 운영체계의 확립은 내적 조직의 강화와 외적 사세의 확장으로 시작된다. 모두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 수립 결과로, 전자는 적정 능력에 따른 직제의 수립이고, 후자는 모기업을 지원하는 자회사의 운영이다. 「국악신문」의 운영체계 수립은 창간 2주년을 전후한 제40호 발간 이후로부터다. 편집국 진용이 갖춰지고 전국에 지사를 설립한 시기가 바로 이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직제의 수립은 기자는 물론 전문가에 의한 고문과 자문위원 진용을 갖춘 것은 객관적인 위상을 확립한 것임을 알린 결과이다. 외적으로는 배달 업무와 지역 뉴스 확충을 위한 전국 주요 지역의 지사 설립이다. 전국 11개 지사인데, 춘천 평택 여천 마산 진주 남원 대전 김제 정읍 군산 인천지사이다. 모두 국악 거점 지역으로 지역소식 확보와 신문 배달업무에 긴요한 지역 안배인 것이다. 또한 부대사업으로 운영 자금 확보를 위한 ‘공연기회 대행’ 사업의 개설이 있었다. 대관업무, 홍보, 공연표 예매, 프로그램 전단 제작 등을 대행하는 업무이다. 제51호 판권을 보면 "고문 정범태, 발행 겸 편집인 김호구, 편집 이자균 김정아, 사진, 임준섭 정수미, 편집 자문위원 변영호 채치성 오용록 이명준 우실하”로 확인된다. 이 체제는 당시로서는 어느 주간 신문사 편집진 못지않은 진용이다. 특히 고문 정범태선생은 국악예술인 사진작가로서 당대 최고의 위치였고, 자문위원들 역시 당시 현장과 이론을 갖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다만 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우실하 위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초기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우실하 위원은 이후 편집국장과 필자로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이었다. 현재는 한국항공대 교수로 ‘3수 분화의 세계관’(2012년),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년),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년), ‘전통음악의구조와원리: 삼태극의 춤’(2004년)을 발간한 전통문화 학자이다. 2000년대 초에는 "요하(遼河)문명이 발견된 이후 중국은 자국 문명의 기원을 완전히 새로 쓰는 작업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의도대로 상고사 재편이 마무리되면 고조선 이후 한국사는 자동적으로 중국사의 한 갈래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라는 중국의 동북공정 상황을 전해 충격을 주기도 한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전문가 이다. 현재 동북아문화 전공교수로 또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글, 우주를 품다!’ 전시회 개최(본보 2월 3일자 참조) 중인 한글창제 원리를 풀이한 회화 작품으로 기법과 주제에서 화제를 낳고 있기도 하다. 우실하 위원은 본보 40호~60호 전후 편집국장 재직시 지면을 개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존의 현상적인 기사 중심에서 대부분을 외부 전문 필자의 심층기획 기사로 확충하여 질을 향상시켰다. 지면 구성에서도 사진과 표제 포인트를 대형화 하여 가독성을 높였다. 또한 자신이 직접 집필을 맡아 국악 전문지로서의 정체성 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중 연재물 두 편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본보 제49호 1997년 2월 28일자 ‘음악문화 다시 읽기’라는 코너 '우실하의 우리문화를 읽는 정당한 인식틀'이다. ‘다시 읽기’와 ‘정당한 인식틀’이란 키워드에서 짐작되듯이 전통음악 이해에 개혁을 촉구한 글이다. 2수 분화인 음양론과 3수 분화인 삼재론이 4,5세기 완전한 이론으로 자리 잡는데, 이는 2천년 전부터 자리 잡아 온 우리(東夷族) 사유체계이고, 이로부터 중국과 일본과 다른 우리 음악 특징이 발현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특징이 농현의 발달, 3분박 중심, 정간보 3등분 율명 기입, 시조 고악보 기입 특징 등이라고 했다. 이는 분명히 3국시대 이후 문헌 중심의 음악사 체계와는 다른 ‘인식틀’을 넘어선 이론이다. 앞의 연재에 이은 것이 ‘음양 오행 삼재론으로 본 풍물’이다. 강릉풍물, 전라우도 이리풍물, 경북 금륭농악 등의 농기와 복색과 집번 등을 이론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연재물은 2004년 저서 ‘전통음악의구조와 원리: 삼태극의 춤’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후 우리 전통문화의 근본 이론을 제시하는 다양한 집필이 이루어졌다. 이런 내용은 당연히 국악신문의 방향성, 즉 ‘민속음악 중심의 국악 위상 정립’이라는 창간 이념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실하 위원은 국악신문 26년사에 기억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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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우주를 품다!’ 전시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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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러수교30주년기념 러시아 청소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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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 인물은 이혜솔 국악인이다. 사할린 동포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나타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은상'을 수상하게 한 국악인이면서 아리랑 전승자이다. 이후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들도 이회장의 활발한 전승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로 세계가 멈추었을 때 지난 3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독도에서 제주까지' 전국 아리랑전승단체를 찾아가서 아리랑코로나를 알리고 현지 답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1952년생) 대표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Q. 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단체와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잘 마치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무관중 언택트 공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A.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수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금년의 국악계는 어느 분야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의 제1조건이 관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관객 없이 해야 하는 공연을 위해 극히 제한된 출연자와 스탭과 관객으로 치룰 수 밖에 없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20명만 올라와야 하는 조건에서 극장밖에 있다가 다른 공연팀과 계속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를 해주어서 잘 마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날을 기원해 봅니다. Q. 매년 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축제를 올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와 함께 무사히 치루었는데, 올해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행사 주제는 무엇입니까? A. 전 세계가 멈춰어져 있는 이 어려운 "코로나19 고개를 넘어가보자”라는 의미에서 어서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힘든 고개를 아리랑 고개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가지고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과 힘을 합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 공연에 담아보았습니다. Q. 이번 행사에서는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코로나 19사태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를 정하셨네요. 회원들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난생 처음 실시된 무관중 공연에서 어려운 점이 었었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실험적 무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우리는 코로나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는 바로 통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공연은 코로나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동안 모든 공연은 절대적 관객 대상 공연이었지만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우리 출연자 스스로를 향한 공연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Q. 전체 프로그램은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대동의 노래, 제2부는 상생의 노래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나요? A. 전국 지역에서는 아리랑의 힘으로 대동단결하여 코로나를 막아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안정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상생의 노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역은 '왕십리에서 제주까지' 불리는 지역 아리랑으로 구성했습니다. 왕십리아리랑을 시작으로 서울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밀양아리랑, 제주아리랑 등이 불려졌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지만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사람은 아라리를 부르고. 경상도 사람은 밀양아리랑, 제주에서 올라온 이는 제주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제주아리랑은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 명창이 불렀습니다. Q. 코로나로 처음으로 개최된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제10회를 맞이하는 소감은? A.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우리 경기 아리랑 선율인 왕십리아리랑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리극 ‘김소월이 사랑한 왕십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왕십리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작사하고, 통일앙상블 대표 윤은화가 작곡한 새로운 아리랑인데, 어떤 내용이 담긴 사설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 반응은 어떤가요? A. 첫 소절은 처음에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라고 시작합니다. 본조아리랑을 선율로 해서인지 일단 경쾌하고 따라서 부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는 왕십리아리랑을 작편곡 한 윤은화 작곡가와 통일앙상블 밴드(9명의 연주자)가 함께 가서 연주 반주에 맞추어서 불러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미 음반 작업을 하면서 함께 연습을 한 팀들이 그대로 갔기 때문에,,,,..그래서인지 현지 동포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고 음악가들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부고 왔습니다. 2019년 봄에 왕십리아리랑제에 관객으로 참가한 사할린동포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 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이 아리랑을 만들게 된 연유는 제가 청년기부터 몸담고 살았던 서울 동부의 중심지인 왕십리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가락에 성동구 지역 역사를 담아 보았습니다. 아리랑의 대동정신으로 지역공동체 결속에 이바지 하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일본, 사할린 공연에서 동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본조아리랑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은 결속력을 속성으로 하는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롭스크 동포들이 와달라고 했는데 올해 못갔죠. 코로나로......코로나만 종식되면 바로 갈려고, 트렁크 짐은 싸놓은 채 그대로입니다. 작년 2월 초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가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Q. 지난 해 2월초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로 바로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각해지자 아리랑코로나를 지어서 코로나를 막아내자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카다로그 앞에 나와있는 이 가사가 아리랑코로나인가요? 어떤 계기로 해서 만든 아리랑인가요? A. 지난 5월에 새로 만든 ‘아리랑코로나’가 무대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세는 한풀 꺾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면서 신규 확진자가 늘어면서 전국 축제와 예술활동이 거의 중단된 현실에서 이번 무대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Q. '아리랑코로나'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나요? A. 일제강점기 1930년대 종두선전가라는 종두아리랑. 마마아리랑이라는 방역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아리랑으로 천연두 전염병을 이겨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랑의 힘으로 전세계를 멈추게 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입니다. 90년만에 나온 방역아리랑, 특별한 아리랑이지요. 이회장은 주먹을 높이 쳐들면서 이번 코로나19를 막아내자는 방역아리랑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독도 울릉도에서부터 제주까지 찾아가는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 동포들에게 녹음을 해서 전해주고 국내 이주하고 있는 동포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고려인 청소년과 하바롭스크 사할린 동포들에게 음원과 동영상을 전해주고 있다. 아리랑코로나 노래가 알려지자 (재)아리랑선풍재단 아리랑체조단도 이 음원을 보내주면 집단체조를 해보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코로나 택시는 탈만큼 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어 도망간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 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Q. 2년동안 아주 특별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인이신가요? 부모님 중 누가 소리를 잘하신 분이 계셨나요? 소리를 하시면서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A. 아버님 고향은 청주이시고, 어머니는 경기도 평택이시지만 어릴때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판소리 춘향전은 다 외우셔서 사랑방에 손님들 모이면 걸죽하게 뽑아 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풍류객이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을 오가며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모두 다 소리를 잘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쏙 닮아서 통성입니다. 나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풍류를 찾아서 서울을 오가는 멋쟁이 아버지는 살림을 나 몰라라 하셨습니다. 갈수록 식구들 입은 늘고 살길이 막막해지지만 청주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양반집 친정에서 곱게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친정에서 곡식을 얻어서 우리 식구들 먹이다가.....나중에는 나어린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몇번이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었다가 모진 목숨 건지게 되자, 장남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키겠다고 7남매를 끌고 생면부지 서울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용두동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젖먹이를 업고 어머니는 묵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언니가 촛불을 키고 바느질을 하다가 집에 불이 나서 이불이고 신발이고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창신동으로 이사를 가서 임시 천막을 치고 맨 땅에서 추우나 더우나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이고 나간 함지박에 매일 벽돌을 한 두개씩 사서 이고 들어오셨습니다. 매일 천막안에 사방에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서 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방을 두를만큼 벽돌이 모아져서 그 자리에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묵장사로 목돈을 모우신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비단을 받아서 이고 지고 나가서 비단 보따리 장사로 우리 7남매 자식들을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으로 우리 형제는 하루 하루 커가는데, 판소리와 경기소리에 미친 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시느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긴긴 세월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 하시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사내 대장부처럼 우리 7남매를 굳건히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딸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제가 가장 많이 닦아 드렸습니다. 두 언니들은 바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에....어머니는 늘 저에게 "곱게 자라야 시집가서 고운 대접 받는다"고 막내딸만큼은 손에 찬물 안 묻히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가이없는 정성을 자식을 낳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없는 막내딸이지요. 이렇게 우리 7남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매일 바라보며, 우리 7남매는 "중용을 지키고 불손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5시가 되면 일어나서 달이 뜰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졌습니다. 그 덕에 모두 일찌기 자수성가해서 서울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쁜 작은댁을 데리고 사시던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시고 중풍에 쓰러져서야 집에 돌아와 안주하시게 되었지만..... 몇해 동안 앓다가 결국 조강지처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이때 우리 형제는 불같이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아 들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하신 슬픈 어머니의 한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힘들때나 기쁠때 양평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지인들의 어머니만 뵈도 가슴이 떨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 엄니.....그래서 저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국악 입문경위 Q. 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미워하는 아버지의 목을 빼닮아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네요. 유년기에서부터 들어온 사랑방에서 장구 장단에 부르는 노래 소리가 서울에 이사와서도 낯설지는 않았겠죠. 유년기에 무대같은 데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나요? A. 어릴 때부터 고향 청주에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소풍을 갈때나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늘 일등으로 불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서울에 이주하게 되자 저축을 하여 돈이 생겨서 제일 먼저 산 것이 녹음기입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들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반을 사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민요 가락을 따라 부르는 저를 보고 피는 못속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10대는 소리 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지세웠습니다. Q. 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A. 언젠가는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지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정이 안정되고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비로소 마흔살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운 소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도 녹음을 해가지고 와서 일하면서 반복해서 혼자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당시 단순노동에 불과한 자영업을 하면서 소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과 꿈을 주었습니다. 테이프를 틀고 들어보니 이 소리들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신명나게 불렀던 노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서리치게 그리 좋아하시던 그 노래를 이제는 제가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더욱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노래(민요)를 녹음을 안해 놓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 눈을 감으면 정가, 민요에서 판소리까지 즐기시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경기민요를 배우게 되고 무대에 서게 되자 집안(남편)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습 공간을 따로 얻어서 소리 도반들과 같이 매일 모여서 공부를 하는 바람에 점점 소리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나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심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민요 전수자들에게 지도하는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내공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을 찾아서 경기민요부터 서도민요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은관 선생에게서 서도민요 이수를 받았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샌줄 모른다고..... Q. 늦게 배운 소리에 불구하고 서도민요 이수자까지 했으니 원은 푸셨네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는 어떤 스승에게 배우셨나요? 소리 공부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 계시나요? A.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순자 선생님, 김경배선생님, 이은관 선생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선생님, 전숙희선생님, 김혜란선생님께 사사했습니다. 그 중 이은관 선생님이 무대에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전숙희 선생님과 김혜란 선생에게 혹독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이제는 자산이 되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자들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가지고 옵니다. 늘 스승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Q. 경기민요, 서도소리를 이수하고, 강원도 '아라리'도 배우시고, 최근에는 ‘제주민요’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제주의 소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A. 오랫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제주도 소리 친구 유재희 선생이 제주민요축제에 초청공연으로 자주 가게 되면서 신비로운 서우제소리에 반했습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수십년간 불렀지만, 제주민요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서우제소리를 들으면 배를 타고 신비로운 섬으로 끌려가는 듯한 선율에 넋이 나가더라구요. 이어도 소리는 여자들만이 산다는 섬으로 떠나간다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속세를 떠나서 유토피아로 떠나가는 거지요. 한번 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엿말 하면 나 눈물 난다. 이엿말은 말앙은 가라.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한다." 어느새 둥둥 배를 타고 상상속의 섬으로 떠나가는 환타지가 느껴지면서 온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거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주민요를 들으면 어머니가 더욱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제주민요도 조금씩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레파토리는 사할린아리랑 이회장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출범 이후 첫번째 지도자로,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바롭스크 아리랑지부 회원들이 와서 아리랑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때, 바로 출국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미루어진 상태이다. Q. 지난 해 3월부터 10월까지 지도를 해주신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 지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상 소감은? 어떤 감동이 들으셨습니까? A. 아리랑학교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를 구하는데 1년동안 책임을 지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양주까지 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주나 문경 같은 지방에서는 1번만 와주겠다는 겁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바뀌면 일정한 곡을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리랑학회 위촉을 받고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섹스폰 연주하는 친구들과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수업시간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선율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섹스폰 연주까지 들려주며 지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0월 14일 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위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서 단원들 12명의 의상을 새로 마추고 소품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한복 무대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도 관객들도 모두 함께 구구절절한 서러운 사할린아리랑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일본놈 무섭어 따라왔지” 강제동원으로 끌려 간 4만명 조선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70년의 한을 가슴에 묵혀두고 있다가 터진 것이지요. 심사위원들이 20여 단체의 경연자 중 2등상인 은상까지 주셔서 그분들의 깊은 한이 그날만큼은 치유가 되셨을겁니다. 왕복 7시간이나 되는 왕십리에서 양주를 다니면서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지만,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아리랑을 배우려고 하시는 열망 때문에 더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수상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환갑 이후 저의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겁니다. Q. 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지역적으로 55단체가 존재합니다. 경기도에만해도 10여 단체가 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김포, 인천. 가평. 포천, 수원 등등에서 양주끼지 오기는 너무 멀지요. 길이 막혀서 약 왕복 7시간 이상 걸립니다. 드디어 10월 중순 작년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에 이어 올해 사할린 동포들과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아리랑 전승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합니다. 올해 계획은? A. "사할린동포분들께 내가 해드릴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분들께 아리랑을 가르치며 보람이 있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그리운 조국 한국 나와서 아리랑을 배우시고 싶다는데. 아무리 멀어도 최선을 다해서 해드리고 싶어요. 우선 사할린아리랑과 아리랑코로나 2곡을 가르쳐드릴겁니다. 양주와 인전 지역 사할린 동포들과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러시아 동포을의 요청을 받아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러 갈겁니다. 지금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Q. 사할린 동포들에게 직접 아리랑을 가르친 첫번째 사례입니다. 아리랑 소리꾼으로써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제가 사할린 동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 KBS특별생방송 '누가 이사람을 아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형제 찾는 방송을 보고 울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영주귀국 해서 사신다는 것은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조국에 오신지가 15년이나 되셨다는데..... 4천명이 오셔서 전국 25지역에서 살고 계신다는데,,,,,,,,,작년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을 했던 100여 분의 사할린 동포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김세르게이 음악가가 살고 계시는 곳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있고, 인천에 영주 귀국하신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님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아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아리랑학교에서 위촉을 받고 망서림 없이 수락을 하고 사할린아리랑에 이어 올해는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학교 수업을 통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이주한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노래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전승자라는 이름을 걸고 동포들을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 동포 중 이번에 제자로 삼은 어린이가 있으시다는데 소개를 해주세요. A. 제가 신아리나를 처음 본 것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축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독창으로 부른 당시 5살 먹은 당차고 씩씩한 신아리나(8세)입니다. 이번에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4세로서 할머니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언니(14세)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면서 영민한 신아리나 어린이를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회원들과 함께 장학금도 보내 줄려고 합니다. Q. 전국55단체 아리랑전승단체 중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후발주자이지만, 작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사할린아리랑제 등 국가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느낀점은? A.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각 지역 아리랑보존단체 50여개 지역단체가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현장에서 국악인으로서 아리랑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각각의 지명을 달고 창출된 **아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60여종 아리랑이 전국에서 불려진다는 것.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대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에 자부심이 앞섭니다. 거기에는 책임같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일년 전에 일본 땅에서 개최된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가슴이 벅찼어요. 처음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연락을 받고 출발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간거지요. 추모제를 준비하는 주관단체가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 구름같이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시절 일본 농촌이나 오지로 시집을 간 한국 여성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도라지타령과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손 잡자마자 바로 눈물이 앞섰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을 추모하는 '아무르아리랑'을 헌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리랑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국악인으로 살면서 ’노래의 힘‘을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A. 아리랑을 통해 노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애국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불렸고, 강제이주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른 디아스포라 아리랑인 사할린아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통해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러시아 동포 3세 4세들도 아리랑을 부르고 알더군요. Q. 그렇다면 가장 자극을 받은 아리랑축제는? A.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무대에서 러일남북중 5개국에서 향유하는 아리랑이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부른 양상을 보고, 아리랑의 다양성에 대해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흥얼거리는 민요가 아닌 바로 애국가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만의 아리랑을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리길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결성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간 것입니다. Q. 30여 년 국악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담아낸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 음반은 녹음을 마친 걸로 아는데 언제 발매가 됩니까? A. 처음에는 왕십리아리랑(작편곡:윤은화)을 중심으로 4년전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을 녹음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사할린을 다녀오고 나서 사할린아리랑을 편곡하여서 넣으려고 합니다, 추가로 아리랑코로나도 넣고 싶고, 그래서 4년이나 끌었습니다. 이제는 아리랑에 욕심이 납니다. 내년에는 나올겁니다. Q. 최근 3박 4일 동안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함께 제주도아리랑답사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A. 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서귀포 역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아리랑 역사에서 사할린과 제주도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본조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본조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1940년 전후 제주에서도 사할린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본조아리랑을 불렀지요. 문헌에 있는 제주아리랑 선율은 본조아리랑입니다.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가지고 간 아리랑이라고 봅니다. 출가 해녀들이 대마도나 홋가이도로 동원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부른 아리랑도 본조아리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쳐준 아리랑고개가 존재한다는 것, 이번 답사에서 민족 고난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Q. 앞으로 계획은? A. 내년에는 왕십리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올해 준비를 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적 거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부득불 취소를 했습니다. 국내외 이주한 다문화 어린이들과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아리랑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아리랑학교 아리랑 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면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수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러시아 아리랑학교가 성사되어 아리랑배우기 수업이 완수되기를 기원합니다. 연혁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2016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결성 2018년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설립/이혜솔 이사장 취임 안중근의사추모제(주관: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초청명창 위촉 제8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2019년 아리랑학교 지도자 위촉(아리랑학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 위촉 (공동주관:아리랑학회)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 (양주사할린동포협회, 율정마을) 제9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제7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 전국아리랑전승단체(55개 지역단체) 워크샾 참가(주관:문화재청) 경복궁 아리랑고유제(45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명창 초청공연(이혜솔의 아리랑) 2020년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주관(주최:성동구청)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 가입단체 아리랑코로나 발표회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 부르기’성료 (공동주관:아리랑학회) www.arirang129.com 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다. 기관과 학계에서는 50여 종의 아리랑 곡명을 누구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함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제시한 수는 명목상의 수이지 자체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셀 수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는 음반에서 정리한 곡명 수를 192종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사 기관과 목적에 따라 그 수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자기 복제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이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이 세 번째를 함의한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가치 향유를 목적으로 한 아리랑 전승단체가 더 형성될 것이고, 그 범위가 세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결성과 창작 활동은 이 세 번째의 함의를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래되는 전통민요만 알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창작되었고, 그해 10월엔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한 ‘본조아리랑’이 탄생되었으며, 1934년엔 ‘진도아리랑’,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 1972년엔 ‘상주아리랑’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아리랑은 댓구 형식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2줄의 사설, 2줄의 후렴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서, 외국인들도 한번 들으면 누구나 기억하기 쉬어서 각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지어 부르기도 쉬운 노래다. 이는 아리랑이 가진 창작과 개사의 속성을 지닌 '노가바' 형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속성에 맞게 ‘왕십리아리랑’도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코로나 가사를 받고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를 이기자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알리고, 사할린 동포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치는 아리랑동지! 다시 한번 우리는 이혜솔 회장의 자발적 전승활동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반겼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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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樂聖) 난계 박연의 고향, 영동을 찾다영동역 앞으로 흐르는 영동천을 따라가다 보면 금강 줄기와 만나게 된다. 물길은 곧 힘껏 휘감았다가 뻗어나간다. 금강으로 둘러싸인 곳. 이곳에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자취가 남아 있다. 박연 선생은 조선 세종때, 음악가로 위대한 업적을 남겨 거문고의 왕산악(王山岳), 가야금의 우륵(于勒)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난계공은 고려 우왕 4년(1378) 충북 영동군에서 태어났다. 여기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5월 사료를 바탕으로 생가(生家)가 복원되었다.(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하고당1길 14-17) 어귀에 서서 보는 생가는 가슴 높이의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 조그마한 팔작지붕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본채와 부속채가 보인다. 본채는 전후퇴가 있는 기와지붕의 겹집으로 2칸에 걸쳐 마루가 놓여있고 나머지 칸에는 부엌과 곡식창고가 자리하고 있다. 부속채는 외양간과 광, 방 1칸으로 초가지붕이 놓여 있어 본채와는 다른 정겨움을 보였다. 박연 선생은 어려서부터 피리, 거문고, 비파 등 여러 악기를 능히 연주할 정도로 음악적 자질이 뛰어났다. 솜씨가 좋아 연주할 때면 주변에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췄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난계공은 140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장원으로 등과하였다. 집현전 교리(敎理), 지평(持平), 문학(文學)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는데, 세종이 대군이던 시절에는 직접 문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는 악학별좌에 임명돼 악사를 맡아 당시 불완전했던 악기를 개량하고 악서를 편찬하였다. 이후로도 세종을 도와 국악 발전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1428년에 세종으로부터 "세상일에 통달한 학자이다.(可謂通儒, 세종실록 10/02/20)”라는 평을 받았으며 1445년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3년 계유정난에 막내아들 박계우(朴季愚)가 처형되면서 연좌로 화를 입을 뻔 했으나, 3조에 걸쳐 봉직한 공으로 파직에 그쳤다. 그 뒤로 선생은 고향인 영동에 내려와 지내다가 1458년 3월 23일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장되었으며 영동 초강서원(草江書院)에서 제향하였다. 묘소는 현재 영동 국악체험촌 안에 위치하고 있다.(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국악로1길 33) 체험촌에 들어와 우리소리관 앞으로 놓인 오솔길을 100m 정도 따라가다 보면 돌계단이 보이는데, 계단을 마저 오르면 마침내 넓게 트인 터가 나온다. 박연 선생의 묘소는 1987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능선에 쌓아올린 축대 위로 두 개의 봉분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안쪽에는 난계공의 묘가 있고 그 앞에는 선생의 부인 묘가 놓여있다. 아마도 터가 좁은 탓에 나란히 두지 못한 듯하다. 묘역은 잘 정돈돼 있고 묘비와 망주석, 상석이 함께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3대 악성의 묘소라기에는 무언가 조금 아쉽고 소박해보였다. 묘소 앞에는 호랑이 석상과 조그마한 가묘가 있는데, 여기에는 뭉클한 설화가 전해져 온다. 난계공은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었는데, 2년 뒤에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큰 불운을 겪게 되었다. 평소에 효심이 깊었던 선생은 6년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에 감동한 짐승들이 찾아와 자리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묘살이를 함께했던 호랑이가 나중에 함정에 빠져 죽자 박연 선생이 직접 거두어 묻어주고 제사도 지내주었다는 것이다. 묘소에서 나와 금강줄기를 따라 가다보면 영동과 옥천에 걸친 달이산 남쪽 끝에서 옥계폭포를 찾을 수 있다.(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산75-1) 옥계폭포는 박연 선생이 자주 찾아왔다고 하여 ‘박연폭포’라고도 불린다. 어찌나 자주 찾았던지 폭포 주변에 피는 난초의 ‘난’과 옥계폭포의 ‘계’를 합하여 자호를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선생은 이곳에 오면 꼭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폭포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겨울에 들어 수량이 줄어들고 나무가 앙상해졌지만, 깎아내린 듯한 절벽 사이로 들어오는 하늘과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난계공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피리 솜씨를 갈고닦았을 것이다. 절경에 빠져 폭포를 보고 있자니 박연 선생이 바위에 걸터앉아 피리를 부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재생되었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조화로운 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영동군은 1973년 난계사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으며, 매해 9월 말과 10월 초 사이에 난계국악축제를 개최해 박연 선생의 정신을 기리면서 국악의 발전과 대중화에 공헌해오고 있다. 3대 악성 난계공의 유산과 업적은 오늘날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난계공의 자취를 느껴보고 싶다면 영동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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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유공자이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건국공로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수훈하신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일대기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독후감 공모전(2020년) 시상식을 개별 시상 방식으로 거행했다. 이번 독후감 공모전의 무궁화상(국가보훈처장상) 수상자 김기도 님은 그의 작품〈나를 조선 땅에 묻어주오〉를 통해 헐버트 박사를 단순한 한국 독립 운동을 넘어 현재 대한민국이 당면한 미래 문제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숨겨진 독립운동의 거두(巨頭)라고 평가했다. 그 외 백두상(기독교대한감리회 회장상) 2명, 한라상(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상) 3명, 아리랑상(서울YMCA 회장상) 5명이 수상했다. 시상식은 정부의 코로나 방침에 따라 세 차례에 걸쳐 개별 시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독후감 공모전(2020년) 수상자 명단 무궁화상(국가보훈처장상) ---------- 김기도(디자이너/만화제작자) 백두상(기독교대한감리회 회장상) --- 김다혜(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4학년) 외 1인 한라상(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상) --- 곽영숙(초등학교 방과후 교사) 외 2인 아리랑상(서울YMCA 회장상) ------- 김 영규(회사원-굿모닝이엔씨) 외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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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송별회, 그러나 따뜻한 안녕!종로3가 국악로, 거기서 ‘~형’이나 ‘형수’ 소리가 들리면 그건 열에 아홉은 그의 목소리다. 김호규, 국악신문 사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1년이 지났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누구나 기억되지 않는다. 누구나 기록되지도 않는다. 김호규는 기억되고, 기록으로 남는다. 국악인으로, 언론인으로, 문화운동가로. 풍류의 태토 정읍에서 태어났다. 설장고 명인 김병섭의 아들로 자랐다. 국악예술고등학교를 나와 장고를 멨다. 그러다 돌연 독보적인 길을 걸었다. 국악신문 편집 겸 발행인 ‘김호규의 길’이다. 오늘 그를 회고하고, 추모하는 모임이 있었다. ‘국악신문 창간자 故 김호규 1주기 추모 소상씻김’이다. 진행자 진옥섭이 눈물지어 회상했다. 장남 김하늘이 꿋꿋하게 해적이를 풀었다. 마지막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발행한 293호 1면 기사 주인공 임웅수가 후배로서 추모했다. 여건상 모임은 조촐했다. 참석한 지인들은 잔 올려 재배하며 영 이별을 고했다. 가까운 예인들은 악가무로 위로했다. 씻김 과장은 넘치도록 충분했다. 쑥물 향물 청계수로 씻겨서 넋풀어 넋올리고 길닦음으로 배송했다. 여보게 호규, 지난 해 황망히 보낸 서운함을 오늘에서야 풀게 되었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잘 받았겠지. 그랬다면 마음 놓고 가게나. 자네가 남긴 ‘국악신문’, ‘국악 사랑’ 잊지 않고 기리겠네. 내내 내일은 국악로에 가서 내가 먼저 "김호규 사장~”하고 불러 보겠네.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그대 어디 있는지 아니까! "김호규 사장~”(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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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인의총’ 내년에 기념관 건립 착수문화재청 만인의총관리소(소장 이병노)는 만인의총 유적종합정비(1단계) 사업으로 계획 중인 기념관과 관리사무소 건립을 위한 설계를 올해 완료하고, 2021년 사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남원 만인의총(사적 제272호)은 2016년 5월 전라북도에서 문화재청으로 관리 전환된이후 중앙정부 차원의 중장기적 관리‧활용에 중점을 둔 종합정비계획을 2017년 수립하였다. 사무실이 1977년에, 기존 기념관이 1980년에 지어지면서 이제는너무 협소하고 노후하여 전시와 활용, 각종 편의시설 등을 보다 확충하기위한 공사이다. 이에, 2017년 수립한 종합정비 기본계획에 따라 기념관과 관리사무소의 신축 등 유적종합정비사업(1단계)의 설계를 진행하였으며, 올해 설계를 완료한 바 있다. 관리소는 오는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총 200억 규모의 예산 확보 노력을 통해 사업을 완수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기념관과 관리사무소 건립사업(2021~2022)이 추진될 예정이며, 이후에는 유적종합정비사업(2단계)으로 계획되어있는 정문 이전과 광장정비, 주차장 확충 등 경‧내외 정비 등도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정부혁신의 하나로 앞으로도 지속적인 유적정비를 통하여 관람환경 개선뿐 아니라 역사 교육의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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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서삼릉 태실 태항아리 재현품 상설 전시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소장 심동준)는 고양 서삼릉(高陽 西三陵, 사적 제200호) 태실에 태항아리 재현품을 15일부터 상설 전시한다. 태실은 왕실의 태반과 탯줄을 봉안한 곳을 말한다. 전시 목록은 태조의 외항아리 1점, 세종의 내항아리 1점, 인종의 내·외항아리 2점, 숙종의 내·외항아리 2점, 정조의 내·외항아리 2점 등 모두 8점이며, 발굴 당시 출토된태항아리 사진도 함께 전시된다. 이 태항아리들은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태실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행할 당시 출토된 것들을 서삼릉태실연구소(소장 김득환)에서 실제 모습대로 재현한 것으로, 서삼릉태실연구소가 문화재청에 기증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전시계획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는 조선왕실 태실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태항아리의모습을 태실 현장에서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관람객에게 더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태실문화를 이해하는 데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참고로, 그동안 비공개구역이던 태실은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후 국민의 증가하는 문화적 관심과 관람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해설사실, 화장실,관람로 등 관람기반시설을 확충하여 지난 10월 16일부터 개방하고 있다. 서삼릉 태실권역의 관람은 조선왕릉 누리집(http://royaltombs.cha.go.kr)에서 회차당 20명씩사전예약으로 진행한다. 하루 3회 해설사를 동반한 시간제 관람으로 운영 중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마스크 착용 의무, 발열 확인, 안전거리 유지 등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실외관람만 허용하고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생명존중사상을 간직한 태실의 숨겨진 역사와 가치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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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의원, 행정안전부 특별교부금 5억원 확보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도종환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충북 청주흥덕)은 노후화된 공원시설 재정비사업을 위한 특별교부금 5억 원을 확보했다고 8일 밝혔다. 청주 가경동 푸른어린이공원은 2004년 조성된 공원으로 15년 이상 경과하여 시설이 노후화됐고 이에 따른 안전사고 위험과 범죄 사각지대로 활용될 수 있어 이용객들의 불편 민원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장소이다. 이에, 파고라 교체, 운동기구 교체, 우배수 시설정비, 초화류 및 교목 식재 등 재정비를 통해 도심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어린이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함으로써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도 의원은 "어린이공원 재정비 사업을 통해 아이들은 물론 전 세대가 함께 이용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노후화된 여가 공간을 재정비해 시민들께서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도 의원은 지난 8월에 무궁화 어린이공원 재정비사업 5억 원을 확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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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아리랑학교. "제주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기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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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주 지부 현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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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부터 러시아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코로나 부르기' 성료, 독도에서 제주까지,'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코로나 택시는 타고싶어도 못탔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무섭어 도망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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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가족, 러시아 동포들에게 연말선물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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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기념관(관장 이동희), 작품전시회 및 작가간담회 성료11월 21일 농민문학기념관(관장 이동희)의 주최로 개최한 ‘2020 감각으로 체험하는 농민문학 작품 전시회’와 ‘농민소설가 류승규 유품 전시회’가 지난 28일 마무리되었다. 전시 마지막 날에는 농민문학 작가 간담회가 열렸는데 우명환 시조시인, 권효성 수필가, 이명건 소설가, 민영이 기자 등 농민문학 작가 및 관계자들이 참여하였다. ‘2020 감각으로 체험하는 농민문학 작품 전시회’는 농민소설가 및 향토시인의 작품 전시, 농민문학 작가의 시화 전시로 나뉘어 장서실과 야외 전시장에서 진행되었다. 전시 작품으로는 이동희 소설가의 『흙의 소리 2』, 박화배 시인의 『눈 내리는 날 저녁에는』 김학진 소설가의 『울력터』, 정삼일 시인의 『갈대』, 정원식 시인의 『진딧물』 등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들이 선정되었다. 한편 ‘농민소설가 류승규 유품 전시회’는 류승규 사진 전시와 유품 및 자료 전시 등으로 기념관 2층 귀경재에서 이루어졌다. 류승규(1927~1993) 작가는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957년 단편소설 '빈농'으로 문단에 데뷔해 '춤추는 산하', '만세', '농토' 등 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농민문학기념관은 농촌 현실과 농민의 애환을 형상하는 농민문학의 자료의 수집과 정리, 농민문학 작가들의 교류를 위해 2005년 설립되었으며 정기간행물 시화집 발간, 학술 세미나 개최, 작품 낭송 및 전시회 개최, 신인 발굴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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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박물관에 가면 문화재가 즐비하다. 그 옆에는 해당 문화재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만들어진 시대, 크기, 무게, 쓰임새 등 열심히 읽어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게 된다. 문화재를 더욱 잘 이해하려면 객관적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살지 않았던 시대와 장소로 들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면 스토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문화재에 숨겨진 이야기를 한껏 풀어놨다. 신라, 고구려, 고려 등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을 쓴 필자의 스토리텔링이 빛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평양박물관장이 평양 기생 차릉파에게 신라 금관을 씌워 조선인들이 들끓은 일, 석굴암을 떼어 통째로 일본으로 옮기려 했던 시도, 고(故)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를 돌아오게 한 노력 등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책 마지막에는 ‘일본에 있는 국보급 우리 문화재’가 화보로 실렸다.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강탈해가거나 헐값에 사들여 옮겨 간 문화재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우리 문화재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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